어느 유년에 불었던 휘파람을 지금
 
   창가에 와서 부는 바람으로 다시 보는 일


 
  바람이 구름 속에서 깊게 울린다 비가오는데, 얼굴이

흘러 있는 자들이 무언가 품에 하나씩 안고 헌책방으로

들어간다 자신의 책을 책장의 빈 곳에 쓸쓸하게 꽂는다

그러곤 아무도 모르게 낡아가는 책을 한 권 들고 펼친다

누군가 남긴 지문들이 문장에 번져 있다 마음이 이곳에서

나귀의 눈처럼 모래 속을 스몄던 것일까 봉인해놓은 듯

마른 꽃잎 한 장 , 매개의 근거를 사라진 향기에서 찾고

있다 떨어져 나간 페이지들이 책에 떠올라 보이기 시작한

다 비가 오면 책을 펴고 조용히 불어넣었을 눅눅한 휘파

람들이 늪이 돼 있다 작은 벌레들의 안구 같기도 하고 책

속에 앉았다가 녹아내린 , 작은 사원들 같기도 한 문자들

이 휘파람에 잠겨 있다 나무들을 흔들고 물을 건너다가

휘파람은 이 세상에 없는 길로만 흘러가고 흘러온다 대륙

을 건너오는 모래바람 속에도 누군가의 휘파람은 등에처

럼 섞인다 나는 어느 유년에 불었던 휘파람을 지금 창가

에 와서 부는 바람으로 다시 본다 마을을 바라보는 짐승

들의 목젖이 박쥐처럼 젖어 있다 나는 그때 식물이 된 막

내를 업고 어떤 저녁 위로 내 휘파람이 진화되어 고원을

넘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의 등 뒤에 숨어서 바라보던 밤

의 저수지 , 인간의 시간으로 잠들고 깨어나던 부뚜막의

한기 같은 것들을 생각하고 있다면 누이야 자전거를 세워

두고 나는 너보다 작은 휘파람을 불어보기도 했다 그런

때에 휘파람에선 어떻게 환한 아카시아 냄새가 나는지 쇠

속을 떠난 종소리들은 어떻게 손톱을 밀고 저녁이 되어

다시 돌아오는지 누이야 지금은 네 딸에게 내가 휘파람을

가르치는 사위 쓸쓸한 입술의 냄새를 가진 바람들이 절벽

으로 유배된 꽃들을 찾아간다 절벽과 낭떠러지의 차이를

묻는다



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 
김경주 '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' 中에서
Posted by brownsoulcity